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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희망이 왠 유대인이냐?


일반적으로 유대인을 떠올리면
'독하다 돈밖에 모르는 천민자본주의에 착취되어 있는 희귀민족이다'
라고 떠올리는 분들이 대부분일것이다. 그리고 종교와 지리적문제로 끊임없이 침략을 당해온 이래, 오랜시간동안 세계 곳곳의 방황그리고 유럽의 각나라에 겨우 정착하게 되었지만, 유일한 의지가 되어준 그들의 신앙 유대교 조차 박대당하고 이제 믿을건 돈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독하게 살다보니, 천민자본주의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전세계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피할수 없었던 아픈 역사는 망각한체, 돈밖에 모르는 독하디 독한 인종들이며 자기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종들이라고 싫어하곤 했다. 자기들만 신에게 선택되었다는 논리나 그들사이에 기본이념이 되어버린 천민 자본주의 조차도 결국 한 민족의 아픈 역사속에서 잉태 되어버린 우리모두의 책임, 비틀어진 시간의 진행형인데도 말이다. 




  
우리 고려인들의
역사도 그들 유대인과 비슷하다.
고구려·발해시대 이후 1860년대부터 다시 시작된 북방개척이민은 일제에 항거한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무대로 자리매김 되면서 한 때 20만 명을 넘어서며 연해주에서 한민족 시대를 다시 꽃피우는 듯 했다.민족 운동가들의 선도에 의해 독립군기지로 이주한 동포들은 곳곳에 고려인 촌락을 건설하고 생계유지와 독립군에 대한 후원을 위해 여러 가지 산업 활동을 펼쳤다. 고려인 동포들 중 일부는 노동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콩·조·옥수수 등을 경작 하였으며, 점차적으로 수로를 개발하여 벼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소작인으로 시작한 동포들은 극히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고 굳건한 고려인 동포사회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이렇게 이들 고려인들은 겨우 정착에 성공하는듯 보였지만,
이후 수많은 비극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제의 잔인한 탄압
1920년 신한촌 참변과 우수리스크 참변 등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해,
겨우 정착해가던 고려인들의 거처는 무참히 짓밟히기 시작했다.


                                        신한촌 참변을 애도하는 추도식



*신한촌 사건(新韓村事件)은 1920년 4월에 연해주 신한촌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흔히 신한촌 참변 또는 4월 참변이라고 부른다

*우수리스크 참변은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의 남쪽에 위치한
도시인 우수리스크에서
76명의 한인들이 일본헌병대에 체포 및 총살 되었다.




                                       4월 참변의 참혹한 모습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고려인의 대부분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한것이라고 한다.1937년 스탈린이 블라디보스톡, 연해주 등 극동 지방에서 살아 가고 있던 한국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유배시킨 이유는 일본의 첩자 노릇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다. 소련과 일본은 이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벌인 상태였고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지방에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그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그런 정책을 펼쳤을 것이라고 보고있다.









하지만 그들 고려인은 굴하지 않았다.
그런 강제이주의 아픈시간을 잘극복한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켰다.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모두 한인 콜호즈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 영웅을 낳았음은 물론이다. 인구 대비 노력 영웅 비율은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를 자랑하였다.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은
아시아 대륙 한 쪽 끝에서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 다른 끝으로 이어졌고 1957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생기자 마음의 고향이었던 연해주로 되돌아가거나 새로운 지역을 택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자식들을 다 잃어가면서까지 힘겹게 제2의 고향으로 정착한 소련에서는 이들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1991년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소련 마저 해체가 되자 고려인들에게는 또 다시 그늘이 찾아왔다.




구소련 붕괴후 또다시 시작된 유랑과 애환의 현실
구소련붕괴와 신생독립국가의 탄생으로 가장 근 타격을 입은 것은 소수민족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고려사람들의 타격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각개전투식의 정착 노력
머나먼 땅 중앙아시아의 여러국가에 던져진 고려인들의 생존 일화들을 들어보면 유대인의 끈질기고 강인한 민족성과 그들만의 탄탄하게 형성된 민족정체성을 느낄수 있었다. 중앙아시아와 연해주를 포함한 러시아 전역에 55만 여명 이상의 동포들이 광범위하게 퍼져서 각개전투식의 정착 노력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전에 러시아어를 주언어로 삼아 살아가던 그들에게 가장먼저 찾아온 시련은 각국의 현지언어문제였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같은경우는 국가의 정책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어를 알지 못하면 변변한 직장조차 구할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그들은 가내수공업등의 단순노동에 종사해 생존을 끈끈히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의 어두운 현실에 급급하지 않고 좀더 넓은 시야로 앞에 다가올 미래를 확신하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제2의 유대인 또는 아시아의 유대인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고려인 동포들은 제2의 유대인 또는 아시아의 유대인이라는 별명을 듣는다. 이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고려인 동포들이 역경을 성실로서 극복하려는 성격을 가진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녀에 대한 높은 교육열 때문이다. 고려인 동포들은 어디에 거주하던 교육열이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재미 동포를 위시하여 남미나 유럽 등지로 이민한 고려인 동포들은 모두 자녀의 교육 때문에 이민하였다고 한다. 고려인 동포들도 갖은 역경 속에서 자녀 교육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였다. 중국의 동포들도 죽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자녀는 반드시 교육을 시키려고 한다. 이와 같이 고려인 동포들은 역경에서도 오로지 낙을 자녀 교육에 두었다.



























결국 구소련의 붕괴이후 끊임없이 교육열을 올리던 고려인들의 자녀들중 다수가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난뒤 한국인의 독특한 능력을 살려 소비에트 연방 내에 정착하면서 문인, 과학자, 언론인, 기술자, 학자, 의사 등 각 방면에 뛰어난 실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밖에 중앙아시아 여러국가내에서 고려인들은 다방면에 특출난 모습등을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 음악계 바이올린 신동이라 불리는 고려인 3세
알렉산드라 리(11)









이렇듯, 강인한 민족애와 역경을 성실로서 극복함으로써

현재 제2의 유대인, 아시아의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동포이며,
우리의 희망일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외면된 그들의 아픈역사를 되새길뿐만 아니라,
이제 잃어버린 우리의 강인함을 그들에게서 다시한번 배워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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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흐르는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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